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문단 편집) === 한니발의 숙적 === 마르켈루스는 로마로 돌아온 뒤 원로원에 승리를 보고하고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시칠리아 전쟁이 지속되고 있고, 한니발이 아직도 건재하며, 승리를 거둔 병사들이 아직 시칠리아에서 복무하고 있어서 개선식에 동행하지 못하는 점을 들어 한 단계 아래인 오베이션(공개 장소에서 군중의 갈채를 받는 의식)을 알반 산에서 받게 했다. 한편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해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저지른 잔혹 행위를 이용하려 했다. 신임 시칠리아 사령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는 이에 부응해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었고 착취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그리스계 시칠리아인을 로마로 보내 마르켈루스의 만행을 증언하게 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할 적임자는 마르켈루스 뿐이라고 여겼기에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210년, 마르켈루스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추첨 결과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 방면을 맡게 되었고, 라이비누스는 한니발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라쿠사 주민들을 기겁해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헀다. 이들은 애도복을 입고 원로원 회의장에 나타나 "마르켈루스가 또다시 시라쿠사를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에트나 화산이 폭발해 섬 전체가 멸망하는 것이 낫다"라며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라이비누스를 시칠리아에 보내고 마르켈루스가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마르켈루스는 군대를 조직한 뒤 살라피아 시로 진군해 그곳의 귀족 발라티우스의 호응 덕분에 손쉽게 공략하고 그 곳에 주둔한 누미디아인 500명을 척살했다. 뒤이어 삼니움으로 진군해 말모레와 멜라를 공략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 2개 군단(20,000 ~ 30,000명)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이후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켄투말루스의 전사와 헤르도니아 시민들이 한니발에게 강제 이송된 사실을 알렸다. 그는 한니발과 맞서겠다면서, 놀라에서 한니발을 3번이나 막아낸 자신이라면 그를 능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산니움에서 루카니아로 진군하여 누미스트로 근처 평지에 진영을 세워서, 바로 앞 언덕에 주둔한 한니발과 대치했다. 마르켈루스는 일전에 동료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지만 절대로 두렵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군대의 선두에서 전장으로 향했다. 한니발은 적진에서 로마의 휘장이 나오는 걸 보고 자신의 군대 역시 카르타고의 휘장을 내세우라고 명령했다. 한니발은 우익 부대를 언덕의 경사면에 배치했고, 로마군은 누미스트로 시를 좌익의 기준점으로 사용했다. 이윽고 한니발의 군대가 언덕에서 진격하고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이 응전하는 방식으로 [[누미스트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전투는 오전 부터 밤까지 지속되었고, 도중에 지친 병사들을 후방의 군대와 교대하여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좀처럼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다가,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자 양측 모두 진지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다음날 새벽까지 진영에서 뜬 눈으로 지새웠고, 적이 야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전사자의 유해를 한 곳에 모아서 불태웠다.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장병들에게 완전한 침묵 속에서 진영을 떠나 아풀리아로 떠나게 했다. 날이 밝아서야 적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마르켈루스는 부상자들을 누미스트로 시에 남겨두고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양군은 아스콜리에서 조우하여 재차 맞붙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니발은 밤에 재차 철수해 아풀리아에 도착했다. 이후 겨울이 찾아오자 양측 모두 아풀리아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기원전 209년,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전임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함께 한니발을 봉쇄하고 그에게 가담한 타렌툼을 정벌하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파비우스는 타렌툼으로 진격했고, 플라쿠스는 루카니아로 진군했으며,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타렌툼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임무를 맡았다. 한니발은 카누시움 근처에 진을 친 뒤 주민들을 설득해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게 하려 했다. 그러다가 마르켈루스가 다가오자, 그는 마르켈루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주민들이 자신의 편을 들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한니발은 일단 후퇴하면서 매복군을 숨겨뒀다.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은 즉각 추격했고, 양측은 교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밤이 돼서야 물러나 숙영지를 세웠다. 다음날 양군은 재차 맞붙었는데, 이때 한니발이 숨겨둔 매복병이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전황은 위태로워졌고, 라틴 동맹 징집병으로 구성된 첫번째 전열의 측면이 무너졌다. 마르켈루스는 퇴각하는 동맹군을 구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된 군단을 투입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로마군과 진군하는 로마군이 서로 뒤엉킨데다, 카르타고군이 맹렬히 공격해왔기 때문에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로마군 전체가 붕괴되어 숙영지로 도주했는데, 그중 2,700명은 숙영지에 미쳐 들어오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적과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이 [[전투 코끼리]]를 투입해 로마군의 전열을 무너뜨리자, 로마군은 투창 세례를 퍼부어 코끼리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게 만들어, 적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마르켈루스는 이 틈을 타 기병대를 전투에 투입했고,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전투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마르켈루스는 전날보다 많은 병력을 잃어야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 전투에서 8,000명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이후 한니발이 남쪽으로 철수했을 때, 마르켈루스는 전사자와 부상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당장 추격하지 못했다. [[카누시움 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시누에사로 물러났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베누시아로 물러났다고 한다. 그는 여름 내내 군대를 이동시키지 못했고, 한니발은 그 사이에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해 카울로니아 근처에서 8,000명의 로마군 분견대를 섬멸하여 레기움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타렌툼에서 5마일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때, 파비우스가 [[2차 타렌툼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타렌툼 구원은 실패했고, 플라쿠스 역시 북부 루카니아 일대를 평정했다. 한편,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를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무능한 장군이라고 비난하며 지휘권을 박탈하라고 요구했다. 그 때문에 가족을 잃은 시민들 역시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마르켈루스가 그동안 거둔 공적을 고려해 계속 신임하기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